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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뛰엄이 노는 법" 서평

계수나무 출판사 2009. 12. 11. 17:58


상상력 고갈 시대에 놀이로 승부하는 박뛰엄

 - 김기정, "박뛰엄이 노는 법", 계수나무, 2008


정혜원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 창의력이란 말이 이슈가 되었다. 특히 학교나 직장에서 심심찮게 이 창의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환경이 맘대로, 맘 놓고 상상하고 살 수 있는 분위기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거시적으로는 국제적인 경제난 때문에 사람들이 더 각박해지고 급해진 것이 사실이다. 한술 더 떠서 한국 특유의 상황도 간과할 수는 없다. 척박하고 좁은 국토에서 많은 사람들과 경쟁을 하려면 무언가 나만의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상상력에 근거를 둔 창의력이란 것이다. 창의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권위적인 선생님과 타성에 젖어 문제 해결을 일괄하는 선배를 모시고 과연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담당자들은 ‘창의성’을 정면에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통제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억압하는 것은 아닐까. 마치 만날 수 없는 양가성처럼. 열악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기적’일 수도 있다.

  진정 ‘무’에서 ‘유’를 창출해야 하는 기상천외한 천재군단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객관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국 사회는 기적을 이룬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성공의 타이틀을 거머쥔 스타 대열에 오른 각 분야의 인물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특히 청소년기에 세계를 재패하고 종횡무진하는 인물들을 보면 그 예가 될 것이다. 대중들이 바라보는 화려함과 부러움 뒤에 자리 잡은 그 자신의 희생은 누구도 보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정 부분 희생이 따른다는 거은 감수할 수 있으나 이들이 아직 성장기에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그 시기에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사소한 일상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마치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환자가 해당 시기의 기억이 없어진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정신과 의사가 나와서 이렇게 말한다. 정신과를 찾는 한국의 환자는 외국처럼 선천적으로 정신병을 가진 환자보다 이 환경 속에서 발병하는 환자들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의학적인 용어를 들이대지만 사실 한국 사람들에게 딱 맞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 근원에는 부모들의 비교, 선생님의 비교, 직장 상사의 비교, 즉 비교병에서 시작된 상처라고 한다.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병원에 늘어나는 환자들을 보거나 사회문제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대변해 준다. 표면적으로 부모나 회사 입장에서 하는 질책과 채근은 발전과 성공, 이윤 획득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전장(戰場) 같은 환경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동기나 청소년기에 시작된 증상은 병이 되어 한 사람의 인생을 멍들게 하고 나아가 사회문제로 대두된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런저런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끄집어내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이런 와중에 김기정의 "박뛰엄이 노는 법"이란 작품과의 만남은 황량한 사막에서 볼 수 있는 오아시스처럼 청량감을 주었다. 익히 알려진 작가의 뛰어난 입담과 위트는 단번에 읽히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 상상처럼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자극하는 놀이는 없을 것이다. 작가는 놀이를 소재로 하면서 그 자신도 정신적 놀이에 시작 버튼을 누른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인류의 수명도 늘어났다. 100세를 산다고 가정했을 때 진정 놀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행복한 노후가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뒷받침도 되어야겠지만 그 이면에 얼마나 즐겁게 보낼까 하는 것도 삶의 질적인 면에서 문제가 된다. 놀이는 아동기나 청소년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노년기까지 지속적인 관심과 진행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같은 놀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형과 변주가 진행된다. 그러기에 놀이에 있어 상상력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자신의 삶을 즐겁고 의미 있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놀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일이다.

  부연하자면, 자발적이고 의미 있는 놀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놀이는 모방과 의사소통, 주체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놀이를 하는 주체는 이중적인 면을 띠게 된다. 주체는 자신의 힘과 책임이 있지만 동시에 외부의 규칙과 법에 얽매여 있고 그 자신의 무의식적 과정들에게 구속 당한다. 또한 환경의 힘에 의지하며, 설사 그 가능성들을 변화시키고 확장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여러 가지 면에서 시대와 문화의 가능성들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그러기에 라캉은 주체의 선택과 개별적인 자율성을 강조하고, 보편적이고 무역사적인 주체의 본질을 강조한다. 주체는 특정한 문화의 언어와 이미지들 속에서 자신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활동을 해야 한다. 바로 문학은 이러한 문화와 언어와 그 이미지들의 연속선상에서 만들어내는 놀이다. 작가가 하는 놀이나 독자가 하는 놀이는 모두 상상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이미 놀이는 각 주체에게 주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 되었다. 애니메이션과 영화, 문학 작품, 게임, 테마파크, 요리, 패션 등드의 사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놀이)이 희망이 되고 그 희망을 이루면서 즐겁고 인생의 참맛을 보았다면, 또 그 희망을 통해서 인류를 위해 공헌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현대의 놀이는 할 일 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경박하고 부정적인 개넘이 아니라 한 평생을 풍요롭게 사는 즐거움을 주는 신성한 것으로 전환하고 있다. 놀이는 그 시대, 그 사회, 연령, 성별 등에 따라 변화를 꾀하기도 하고 영향도 받는다. 이 작품에서도 박뛰엄이란 인물을 통해 변화되는 놀이의 양상을 볼 수 있다. 이제 박뛰엄의 다채로운 놀이 인생을 들여다보자.

  이 작품의 구성은 ‘뛰엄이만큼 놀고 싶은 아이들에게 부치는 편지’라는 본문과 ‘숨은 이야기’라는 추신(논문으로 치면 각주)으로 되어 있다. 박뛰엄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증손자 주먹이에게 주는 편지가 동화의 내용이다. ‘숨은 이야기’에서는 독자의 호기심을 해소해주고 내용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작품 구성에도 독특한 면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작품의 화자는 박뛰엄 할아버지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편안하고 또 민담에서 볼 수 있는 기지와 위트도 작가의 입담과 어우러져 아주 맛깔나다.


  오호라, 요게 삼삼 재미나더란 말이야.

  그전에는 정신없이 마구 뛰는 마구뛰엄만 했는데,

  풀숲 위 넘을 때에는 펄쩍뛰엄,

  언덕 오를 때에는 깡충 하는 깡충뛰엄,

  넓은 데 달릴 때에는 쏜 화살 같이 쏜살뛰엄,

  시냇물 건널 때에는 물에 안 빠지게 살짝 뛰엄,

  기운 넘칠 때에는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하는 성큼뛰엄,

  다리 아플 때에는 한발 뛰엄,

  장난으로 세발네발뛰엄…….

  이리 붙인 뛰엄 이름만 108가지나 된다.(32쪽)


  박뛰엄은 자신이 뛰는 종류에도 다 별명을 짓는 이름 붙이기 놀이를 한다. 마치 어린이들이 별명 짓기를 즐기듯이. 흥겨운 마당놀이라도 보듯 한 문장, 한 문장이 리듬을 타고 내려간다. 작품 곳곳에 박진감 넘치는 문장과 어휘들이 읽는 맛을 더해 준다. 특히 글뿐만 아니라 그림도 함께 어우러져 상승작용을 하고 있다.

  학원으로 내몰리고 친구도 없이 컴퓨터 앞에서 가상의 놀이를 즐기는 어린이들에게 진정 놀이가 무엇인지 초장부터 보여 주려는 단호한 의지를 엿보인다. 인간이 발달 단계를 거치듯이 박뛰엄의 놀이도 단계를 거친다. 각 단계의 놀이 말미에 교훈적 훈화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놀 때는 말이다. 내가 그랬듯이 죽기 살기로 뛰면서 놀아야 한다. 덕분에 내가 이 나이 되도록 팔팔 살아 있는 게 아니겠느냐(38쪽)’와 ‘너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이렇다. 도무를 사귈 때에는 네 하는 짓이 동무에게도 좋은 일인가 아닌가를 잘 따져 생각해 보란 말이다. 알겠느냐?(70쪽)’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훈화를 지양해야 하고 독자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훈화조차 작가의 걸진 입담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술술 넘어간다는 점이다.

  박뛰엄의 행장을 들여다보면 그의 놀이 단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단계는 자연 친화적인 놀이로 볼 수 있다. 산골짜기에 친구도 없이 심심하게 지내야 하는 상황과 형들과 터울이 많이 져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는 위치에서 박뛰엄은 범과 친구가 된다. 산속의 동물인 범과 친구가 되어 놀이를 하게 되는데 그 놀이 방식은 술래잡기를 하듯 범과 쫓고 쫓기는 놀이다. 박뛰엄은 범에게 안 잡히려고 죽도록 뜀박질을 해서 부실했던 건강이 좋아져 체력이 강화되는 효과까지 보게 된다. 그러나 박뛰엄의 즐거운 놀이와는 달리 가족들에게 뜀박질 잘 하는 것과 범과 노는 것은 걱정거리가 된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살던 곳을 등지고 다른 곳으로 이사까지 가게 된다. 날짐승의 말도 알아듣는 박뛰엄의 놀이는 신통력까지 있어 보인다. 이 단계의 놀이에서는 소통하는 놀이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과 융화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물활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사람이 아닌 사물이나 동물들과도 대화를 할 수 있으나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이 놀이는 현실적인 놀이라기보다는 상상 놀이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또 박뛰엄은 새로 이사 간 곳에서 처음으로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지만 관계형성에 실패한다. 그의 뛰엄병(달음박질)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놀 수가 없었다. 박뛰엄은 자신의 콤플렉스인 뛰엄병을 산도깨비에게 기지를 발휘해서 팔아 버린다. ‘백 살까지 신나게 노는’ 조건으로 말이다. 박뛰엄은 작품 속에서 내기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놀이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또 도깨비담에 보면 도깨비 역시 내기를 좋아한다. 이것도 어린이들의 특성과 동일시할 수 있는 부분이다. 뛰엄병이 해결되고 나서 친구들과 눈높이를 같이 한 어린이가 되었고 놀 수 있게 되었다. 이 단계에서 박뛰엄은 주로 자연과 동화되어 관계를 형성하고 놀이를 즐긴다. 작가가 어린이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2단계는 일하는 재미와 노동의 기쁨과 관련된 놀이다. 박뛰엄이 1906년이란 설정으로 볼 때 당시 17세는 지금의 청소년기와는 다르다. 이미 혼인을 한 사람들도 많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성인의 대열에 들어선 것이고 이런 연유로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때까지 철없이 놀기만 하다가 농사를 지어봄으로써 열매가 열리는 자연의 경이로움, 수확의 기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박뛰엄이 성인기에 접어들어 자신의 일을 어릴 때와는 또 다른 놀이로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그제야 늦봄에 형님들이 감자 한 쪽씩 밭이 심었던 게 떠올랐다. 그 작은 놈이 가을이 되니 토실토실 살이 오르고, 수십 배로 늘어났구나. 식구가 엄청 늘어나서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게 아니냐. 참으로 신기하고 배부르고 신나는 일이지 않느냐?(80쪽)


  성인이 되었으면 제 밥벌이는 해야 한다는 의미, 땀의 대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어떻게 놀이냐고 반문한다면 성인에게는 일이 주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에 이것도 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성장하면 그 놀이의 종류도, 방식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3단계는 여행과 신선놀음이다. 여행은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보다 직접적인 경험을 하기 때문에 훨씬 진한 감동과 경험을 갖게 한다. 박뛰엄은 장가가기 전 금강산 유람을 떠난다. 금강산에서 환상 세계, 즉 신선이 사는 세계를 경험한다. 집채만 한 학이 이끄는 곳은 다름 아닌 신선들이 노는 세상이다. 신선들 옆에서 훈수를 들었을 뿐인데 삼십 년이 훌쩍 지난다. 평면적으로 볼 때는 뭐가 잘못이냐고 할 수 있지만 신선놀음에 빠지면 자신의 중요한 일은 뒷전으로 밀리고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박뛰엄이 살던 현실과 신선놀음에 빠져 있던 세계의 시간에는 많은 간극이 있다. 이 단계에서 여행은 꼭 권하고 있지만 신선놀음은 인생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놀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4단계는 불꽃놀이에 참여하는 것이다. 박뛰엄이 선계에 있는 동안 많은 일들이 생겼다. 그중 한 가지가 전쟁이다. 전쟁은 무고한 인명을 앗아가는 허무한 놀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을 불꽃놀이로 희화시키고 있지만 실상은 얼마나 무섭고 인류에게 많은 피해를 주는지 말하고 있다. 이것 또한 성인들이 해서는 안 될 놀이라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5단계는 박뛰엄이 현실로 돌아와 인생의 또 다른 맛을 즐기는 놀이다. 삼십 년이 지나 오십 대 남자로 변한 것에 당황하지만 삼십 년 동안 자신을 기다려 준 예쁜이와 결혼하여 또 다른 삶의 놀이가 시작된다. 결혼해서 아내와 오순도순 사는 재미, 자식 낳아 키우는 재미, 손자 보는 재미 등은 인류가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하는 놀이다. 보편적인 인생을 놀이로 규정짓는 것을 경박하게 느낄지 모르나 크게 보면 인생도 놀이의 한 판이 아닐까 한다.

  6단계는 수명 채우기 놀이다. 죽는 날까지 박뛰엄은 자신의 수명을 가지고 저승사자와 정기로 내기를 한다. 도깨비와 약속한 백 살을 꽉 채우기 위해서다. 박뛰엄은 근본적으로 죽음을 산 자와 죽은 자의 단절로 인한 공포나 슬픔으로 인식하기보다 다른 세계로 공간 이동만 하여 놀이를 계속하는 것처럼 유쾌하게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증손자에게 잘 놀 궁리를 하며 살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라는 유언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하면, 이 할아비처럼 죽을 대까지 잘 놀 궁리를 해야 하느니, 어험, 내가 한 말을 잊지 말고, 맘에 잘 새기어라.(124쪽)

  

  마지막까지 박뛰엄의 인생은 즐거운 놀이다. 박뛰엄의 인생 속에는 다양한 놀이가 인간 발달 단계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며, 긍정적인 놀이와 부정적이 놀이도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인생과 꼭 닮아 있다. 우리 인생이 모두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 놀이는 끝이 없다. 죽음마저도 놀이를 중단할 수 없으며 다른 세계에서 또 다른 놀이가 시작됨을 예고한다.

  혹자들은 인생의 답이 없다고 말한다. 어떤 삶도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 김기정은 박뛰엄을 통해 ‘인생은 한 판 걸진 놀이다’라는 통쾌한 결론을 내린다. 격동의 세월을 걸어온 한국 사회에서는 좀 생경한 것일 수도 있다. 바야흐로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을 방법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창의력 계발에 있다. 이런 연유로 한국 사회에 사는 모든 연령대 사람들은 빈약한 상상력을 가지고 창의력 계발에 강박증을 느낀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조금씩 더,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목줄을 꽉 틀어쥔 상태에서 상상력이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놀이를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옥죈 결박을 풀고 스스로를 억압하거나 통제하지 않을 때 비로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놀이다운 놀이를 계발할 수 있을 것이다. 박뛰엄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자못 크다. 인생에서 분명히 경계해야 할 놀이가 있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제시하면서 또 한편으로 즐거운 놀이는 고달픈 인생에 위안과 기쁨을 주는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함께 보여 주고 있다. 우선 놀이 버튼을 누르자. 그럼 상상력의 꼬리가 잡힐지 모른다. 처음부터 큰 기대보다는 자유를 주자. 우리 인생을 위해.



 

정혜원

199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당선. 아동문예문학상(1994), 새벗문학상(1996)으로 등단하였으며, 펴낸 책으로 동화집 <풀피리 아빠>, <투정쟁이와 선녀바위>, <말하는 산> 외 여러 권이 있다. 북원문학상, 문경아동문학상, 원주예술상, 아동문학평론상을 받았다.

 

 


출처 : <열린아동문학> 2009 가을호, 열린 서평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