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팎이 어수선하고 우울한 소식도 여전하지만 그래도 봄입니다.
파주 출판도시에도 계수나무의 사옥 앞에서 봄 기운이 완연합니다.
하루빨리 맘껏 이 봄을 즐길 수 있기를......
오늘은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중에서 가져온 글 하나 소개합니다.
꽃 소식이 올라와도 선뜻 나서기 힘든 올봄
개화와 낙화의 풍경을 마치 그림처럼 들려주는 작가의 글로 잠시 봄을 느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어려운 이 시기를 잘 넘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나눕니다.
-꽃 피는 해안선-
돌산도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 숲은 바닷바람에 수런거린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러운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돌산도 율림리 정미자 씨 집 마당에 매화가 피었다.
1월 중순에 눈 속에서 봉우리가 맺혔고, 이제 활짝 피었다.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품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 핀 매화 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꽃구름은 그 경계선이 흔들리는 봄의 대기 속에서 풀어져 있다.
그래서 매화의 구름은 혼곤하고 몽롱하다. 이것은 신기루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花)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 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배꽃과 복사꽃과 벚꽃이 다 이와 같다.
선암사 뒷산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을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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